사래를 이용하여 큰 부자가 된 아브람은 왔던 길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다시 예전에 제단 세우고 영역 표시 했던 베델 근방까지 돌아온다.
그런데…
바로 전 장, 그러니까 창세기 12장에는 분명 아브람이 먼저 세겜 땅의 상수리나무 옆에 제단을 쌓고 기도한 뒤, 그 다음에 베델로 가서 거기서도 제단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13장에서는 베델에 대해서, ‘처음으로 아브람이 제단을 쌓은 곳’이라고 쓰여 있어서 읽기를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왜 처음으로 쌓았다고 한 거지?
베델 이전에 쌓은 기록이 바로 이전 장에 있잖아?
그래서 역본 대조에 들어갔다…

뉴리빙성서 영문본은 단순히 ‘예전에 제단을 쌓았던 곳’ 정도로 쓰여있을 뿐이다. (This was the same place where Abram had built the altar…)
그런데 왜 킹제임스 영문본과 다른 한글본들에는 제단을 ‘처음으로‘ 쌓은 곳이라고 써놨냔 말이다. (Unto the place of the altar, which he had make there at the first…)
개역개정, 새번역, 우리말성경, 개역한글, 죄다 ‘처음’이라고 되어 있다. 다른 번역본이 또 있겠지만, 일단 내가 확인한 한도 내에서는 ‘처음’이라는 단어가 없는 유일한 번역은 ‘쉬운 성경’뿐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내가 또 이런 건 집요해서 히브리어 성경도 찾아봤다. 창세기 13장 4절이다.
אֶל־מְקֹום֙ הַמִּזְבֵּ֔חַ אֲשֶׁר־עָ֥שָׂה שָׁ֖ם בָּרִאשֹׁנָ֑ה וַיִּקְרָ֥א שָׁ֛ם אַבְרָ֖ם בְּשֵׁ֥ם יְהוָֽה׃
여기서 중요한 절만 뽑으면 이거다.
הַמִּזְבֵּ֔חַ אֲשֶׁר־עָ֥שָׂה בָּרִאשֹׁנָ֑ה
(함미즈베아흐 아쉐르 아싸 바리쇼나)
번역하면,
“그가 ‘바리쇼나‘ 쌓은 제단.”
여기서 바리쇼나의 해석이 문제가 된 것이다. 바리쇼나는 ‘리숀’의 여성단수형 형용사/부사인데, 보통은 ‘처음에’ 라는 뜻이긴 하지만 ‘이전에’ ‘옛날에’ ‘과거에’ 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즉, ‘이전에’ 라고 번역해야 할 것을 ‘처음으로’ 라고 오역했다는 결론.
아무튼 킹제임스 번역본이 틀렸고, 다른 한글성경들도 그거 참조하다 죄다 틀렸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겨우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지침…

…아무튼 간에 베델에서, 아브람네 일꾼들이랑 조카 롯네 일꾼들이 자꾸 싸워서 결국 갈라서기로 한다.
안 그래도 땅이 좁은데, 거기에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Perizzites 정체 모를 민족) 사람들까지 원래 살고 있어서 더 좁았고, 충돌도 많았던 모양이다.
아브람은 너그럽게도 조카 롯에게 먼저 가고 싶은 방향을 고르면, 자기는 그 반대로 가겠다고 한다. 하기사 파라오 등쳐서 한 밑천 뜯어냈으니 나라도 관대해졌겠음.

임마 너는 장유유서란 게 없는 아이구나?
롯은 좋아보이는 요단 들판 쪽을 냉큼 v가지기로 하고v 동쪽으로 간다.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고대인들의 이런 개념 재밌다. 그냥 내가 도착한 땅에 잘 정착하면 그냥 내 땅이 되는 개념 ㅋㅋㅋ
“그래, 롯아! 기분이다! 요단 들판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너 해라!”
롯 일행은 요단 들판의 여러 도시들을 다니다가, 최종적으로 소돔이라는 이름의 도시 가까이에 캠프를 친다.
이제 롯은 소돔의 사람이 되었다. 바로 그 소돔…

정말 너무 재밌어서 죽을 것 같아요.. 극락갈것같아…. 계속 연재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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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힘이라기보다 구약의 힘인 것 같습니다. 그냥 거의 현대말로 옮기기만 하는 건데 웃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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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까지 찾아보는 선생님의 열정과 재미에 제단을 탁 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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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이 나빠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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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가 명색이 흠정역인데 먼 곳도 아니고 바로 앞 장인 12장 내용하고도 안 맞춰 보고 13장을 번역하다니… 그리고 그걸 그대로 답습한 여타 역본들…
성경 번역이라는 것엔 생각보다 신성함이라는 게 깃들어 있지 않은 것 같네요…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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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참고로 공동번역 성서에는 이 부분이 “지난날”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저 역시 불신자입니다만 공동번역본이 신구교 공동 작업으로 꽤 완성도가 높다고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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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공동번역이 가장 낫다는 말을 들었는데, 하필 그 판본이 없어서 ㅠㅠ 구하게 되면 나중에는 그것고 참조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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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holybible.or.kr/
저는 위 웹사이트를 자주 이용하는 편입니다. 번역본을 나란히 함께 대조하면서 읽을 수 있어서 편합니다. 공동번역도 여기에 있어요.
번역본들은 각자 다 한계가 있어서 어느 것이 제일 낫다, 이렇게 말하기가 곤란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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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감사합니다. 저 사이트도 알고는 있었는데, 앱으로 읽는 편이라 평소 보는 것만 보는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술술 잘 읽히는 번역본을 제일 낫다고 말하기는 합니다 ㅋㅋ 제가 뭘 알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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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거 밝히다가 그냥 밝히는 민족이 되어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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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성경을 쓴 사람들은 도당체 무슨 교훈을 주기 위해 이러한 이야기를 적은 것인지 모르겟읍니다
‘욕심부리지 마라 뒤1지기 싫으면’ 이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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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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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정말 엄청난 드립력과 한회에서의 완벅한 기승전결, 그리고 다다음편 예고로 화룡점정이십니다! 계속 눈팅하며 정주행 하다가 노고에 감사드리고자 답글 남깁니다.
번역에 참여하신 수많은 분들 중 분명 “처음으로”의 번역이 이상함을 눈치챈 분들이 있었을텐데, “성경은 모순이 없다”던 목사님의 가르침에 반하여, 번역 중에 하도 많은 모순점들을 맞딱뜨리다 보니 “이거 뭔가 이상하긴한데 분명 목사님이 제대로 된 해석을 알고 계시겠지” 하며 넘어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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